말통묵상 419 - 바울의 언어에서 듣는 구약성경(9)

2022.05.04

말통묵상 419 - 바울의 언어에서 듣는 구약성경(9)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II

이제 우리는 로마서 8:36의 시편 인용(44:22)에서 핵심 주제인 “도살할 양”(πρόβατα σφαγῆς)에 대하여 묵상해보려 한다. 로마서와 시편의 ‘도살할 양’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티프에서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7절)을 반향하고 있다.

롬 8:36 “도살할 양 같이”
NA28 - ὡς πρόβατα σφαγῆς

시편 44:22 “도살할 양 같이”
MT – ‎כְּצֹאן טִבְחָה
LXX - ὡς πρόβατα σφαγῆς

사 53:7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같고”
MT – ‎כַּשֶּׂה לַטֶּבַח יוּבָל
LXX - ὡς πρόβατον ἐπὶ σφαγὴν ἤχθη

구약성경 학자들은 이사야 53장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을 바벨론 포로에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해한다. 특히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의 이스라엘은 “속건제물”(10절)로서 결국에는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한다는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한다. 이사야의 종말론적 구원은 바벨론 포로 이후 활동했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도 나타난다(슥 11:4, 7). 스가랴의 칠십인역(τὰ πρόβατα τῆς σφαγῆς)은 시편 44편과 이사야 53장의 ‘도살할 양’(πρόβατα σφαγῆς)을 헬라어 본문그대로 인용한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다르다. 시편과 이사야의 히브리어(‘도살당하다’)는 ‘제사를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의미이지만 스가야의 히브리어(‘잡혀 죽는다’)는 단순히 ‘식용을 위한 도살’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시편 44편과 이사야 53장을 인용한 바울의 로마서 8:36은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며, 고난의 현실을 그리스도의 사랑(35절) 곧 하나님의 사랑(39절)으로 살아내게 된다고 해석했다.

‘도살할 양’에 대한 바울 이해는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에서도 나타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32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바울은 시편의 ‘도살할 양’과 이사야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반향하고 있다. 비록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의 구절이 구약의 인용본문이 아니더라도 아브라함-이삭의 아케다 사건(Akedah-이삭이 결박되어 제사로 드려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로마서 8:32이 창세기 22장의 아케다 사건을 반향하고 있다는 견해는 고대 신학자 오리겐(주후 185-253년)때부터 줄곧 주장되었다. 즉, 오리겐을 비롯하여 고대의 신학자들은 아케다 사건이 보여주는 ‘죽음과 되살아남’, 그리고 바울이 말하려는 ‘도살할 양과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반향하고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미쉬나-탈무드 시대로 알려진 유대교의 아모라임 시대에 유대 신학자들도 아케다 사건을 이삭의 죽음과 뒤이은 부활, 즉 구속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22장과 로마서 8장, 두 본문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상호텍스트성을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두 본문의 상호텍스트성에서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 곧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고 버려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 '도살 당할 양' 모티브에서 밝히려는 최종적인 의도 곧 “그리스도의 사랑”(3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39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