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통묵상 352 - 성경 뒷 이야기(71)

2022.01.12

예루살렘 이야기(5) - 유다의 멸망 원인

종교적 타락
히스기야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의 사에게 후한 대접을 한 것이다. 그가 병들고 죽어간다는 소식에 예물과 편지를 들고 사자가 찾아오자 그는 예루살렘의 국고와 금은화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와 창고를 보여 주었다(왕하 20: 12-15).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모든 국가적 비밀을 적국에게 보여준 것을 나무라면서 결국 유다가 바벨론의 손에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왕하 20:17-18). 히스기야가 죽고 이스라엘은 정치적 혼란의 상태는 물론 종교적 위기까지 왔다.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와 같은 길 대신 오히려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따랐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겼다.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악을 행하였다(왕하 21장).

당시 유다 왕국에서 종교적 불안은 급증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의하면 민중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여호와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존하고자 함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아세라나 혹은 어떤 여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정이나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다 기둥 몸통 여인상(Judean Pillared Figurne)들은 신앙적 대상이었음에는 의심이 없다. 25cm 높이를 넘지 않는 점토를 구워 만든 이 여인상들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슴을 강조하여 양쪽 손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오직 얼굴만이 중요할 뿐 뒤통수에는 전혀 장식하지 않은 모습 그리고 어딘가 세울 수 있도록 아래를 받침형태로 만든 것 등을 보았을 때 인형보다는 불안한 시대에 풍요를 염원하는 유다인들의 민간신앙적 모습을 담은 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아랏과 브엘세바 등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처럼 유다에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신앙들이 있었다. 결국 유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 외에도 여러 다른 신에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위기
이러한 종교적 타락을 멈춘 것은 요시야였다. 왕하 22-23장은 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종교 개혁을 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그의 종교적 업적을 기록하느라 사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적은 공간을 할애하였다. 비록 요시야라는 인물은 이집트나 바벨론의 역사적 기록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을 살펴봤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유다 왕국을 확장한 왕이었다. 주전 640년경 중동 지역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바람이 불었다. 한때 최고의 강국이었던 이집트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강한 제국 앗수르는 사실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과거 바벨론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이들이 서서히 힘을 모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유다에 관여하는 강국의 세력이 없자 요시야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권을 회복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바에 의하면 그는 지중해변까지 유다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국고를 채우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히스기야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왕의 인장이 찍힌 항아리를 사용하여 세금을 걷어드렸다. 이때 사용된 인장은 꽃잎모양의 인장으로 당시 중동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바벨론의 공격에 고통당하고 있는 앗수르를 돕고자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주전 609년 유다의 지중해변을 지나 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는 유다의 영토를 밟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앗수르가 다시 세력을 장악했을 경우 유다에 닥칠 정치적 압박을 막기 위해서 요시야는 군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므깃도에서 느고에 의해 죽고말았다(왕하 23:29). 요시야의 죽음 이후 국제적 정세의 바람은 유다를 더욱 세게 쳤다. 이집트의 느고는 요시야 대신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여호야김을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중동지역은 이제 이집트도 앗수르도 아닌 바벨론이 그 세력을 얻고 있었다. 요시야 이후 유다의 왕들은 때론 3년 때론 3개월을 재위하면서 바벨론의 동조할 것인가 아닌가 고민하했다. 결국 주전 586년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다”(왕하 25:8-10; 렘 39:8; 대하 36:18-19). 바벨론의 잔혹한 파괴는 다윗 성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곳곳에서도 발견되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막기 위해 세운 망대는 무너졌고 다윗 성은 불타 사라졌다. 성전은 무너졌으며 성전 안 기물들은 약탈당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다.

*바벨론 제국의 확장(Neo-Babylonian Empire by Nebuchadnezzar)

*바벨론의 예루살렘 성 함락 및 성전파괴

*바벨론 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