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통묵상 350 - 성경 뒷 이야기(69)

2022.01.07

예루살렘 이야기(3)

앗수르의 침략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단일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을 더 이상 이끌어가지 못했다. 북쪽의 열 지파는 독립을 선언했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지역은 유다라 불리는 반쪽 국가가 되고 말았다. 북쪽의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러 번 바뀐데 반해 유다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유다의 종교적 수도요 다윗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정치적 수도가 되었다. 나라가 둘로 나뉜 뒤 북왕국 이스라엘은 세계정세에 뛰어들어 아합 시대에 보다 강력한 국가가 된데 반해 남왕국 유다는 이스라엘과의 잦은 국경 전쟁과 앗수르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불안한 정세를 보였다. 덕분에 예루살렘은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변화가 있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전 8세기 고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다. 유다의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했으며 오히려 이스라엘의 위협에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왕하 16장).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재위 초기만 해도 앗수르에게 충성을 받쳤으나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변심했다. 주전 705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왕 사르곤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중동 지역의 앗수르의 속국들은 산헤립이 순식간에 앗수르의 정세를 안정시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앗수르의 정치적 불안의 시대를 틈타 히스기야는 소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반앗수르를 감행했다. 그는 앗수르에게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블레셋 도시 아스글론과 에글론의 동맹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사야는 반앗수르 동맹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사 30-31; 36:6-9). 이사야는 이집트가 곧 포로가 되어 앗수르 왕 앞에 서게 되는 비참한 날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사 20;1-6).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집트와 유다의 동맹국들은 앗수르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산헤립은 재빠르게 앗수르의 주권을 잡아 반앗수르 동맹국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성서는 산헤립과의 전쟁에 앞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재정비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왕하 18장, 사 22장, 대하 32장) 이는 고고학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물 근원을 막고자
수자원이 항상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도시가 발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샘이나 물저장고 시설이 갖추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는 기혼샘이라 불리는 사철 물이 솟는 샘이 기드론 골짜기에 있어 이미 주전 2000년경 가나안 도시때부터 샘을 지키는 탑이 있었을 정도였다. 대하 32: 3-4과 사 22:9, 11은 히스기야가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아래 못의 물도 모으고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성경 구절에 의하면 히스기야는 전쟁 동안 샘의 물을 확보하고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수리시설을 건설하였다. 하나는 성벽을 이중으로 세우고 샘의 물을 모은 저수지요 또 다른 하나는 다윗성 서쪽 끝에 저수지를 만들었지만(대하 32:30)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로(터널)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왕하 20:20).

1838년 이스라엘을 탐사했던 미국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 Robinson)은 예루살렘의 기혼샘에서 시작되는 긴 터널을 걸어 다윗 성 끝 실로암 연못이라 불리는 장소까지 나올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이 터널은 히스기야 터널이라 불리고 있으며 533m 길이에 S모양으로 굽은 석회석 산을 인공적으로 뚫어 완성된 것이다. 최근 터널과 기혼샘 주변을 재발굴한 하이파대학의 로니 라이히(R. Reich)교수에 의하면 주전 9-8세기 경 기혼샘부터 시작하여 다윗성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수로는 주전 8세기말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외부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수로는 분명 적들에게 도시 내부의 수자원이 어디서 어떻게 흐르고 있느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결국 지하에 새로운 수도가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수도가 건설된 시대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수로의 벽면에서 발견된 글귀 덕분이었다. 주전 8세기 히브리어 글자체로 새겨진 글은 수도를 완성하기 위해 양쪽 끝에서 장인들이 파 들어갔으며 1.5m 정도를 남겨두고 틈새에서 들리는 소리로 서로 만나게 되어 이 만난 지점을 기념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히스기야 터널

*발견된 히스기야 터널의 실제 모습


*히스기야 터널에서 발견된 실로암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