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읽는 성서시대 문화와 관습 17 - 광야에서 외치는 자

2022.01.04

광야에서 외치는 자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사역에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내진 광야에서 외치는 자를 언급하고 있다(마 3:3-12, 막 1:2-8, 눅 3:4-20; 요 1:6~24). 그의 이름은 요한이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업적 때문에 세례 요한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 누가복음 1장에 의하면 그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족이었다(눅 1:36). 두 사람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이행하는 의인으로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나이가 많은 가운데 있었다.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기 위해 성전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알려주었고 그대로 되었다. 고대 사회에 아이는 신의 축복이었다. 아이가 없는 것은 저주와 같았다. 잉태하지 못한 여인들은 손가락질 받았으며 그녀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대부분의 고대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아이들 중에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을 이로 더욱 중요한 존재였다. 제사장의 집안이라면 자녀가 없는 것은, 특별히 아들이 없는 것은 더 큰 결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아들이 생겼다. 더구나 이아들을 향한 예언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이는 가족의 기쁨을 넘어 민족의 기쁨이 될 자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을 받고 있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춘 자로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는 어마어마한 신탁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의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예언을 완성하는 위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된다. 더구나 나이가 많아 나은 아이였으니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들은 천사가 말한 것처럼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는 나실인으로 아이를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아버지를 따라 제사장이 되도록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가 상상하지 못한 길로 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이사야 40:3~8을 완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주후 1세기 제사장은 특권층이었다. 제사장은 사두개인 출신으로 교육 받은 자요 민족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록 헤롯이라는 이두매아 출신의 집안이 로마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했지만 대제사장이 여전히 신권과 산헤드린 공회의 수장으로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지위는 유대인 가운데 확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제사장의 아들은 집을 떠나 광야로 나아갔다. 그는 유대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주후 1세기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요세푸스 역시 유대인 중에 세례자라 불렸던 요한이 유대인들을 서로 의롭게 하고 경건함으로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었음을 기록하였다(유대인 고대사 18권, 5장, 2장). 요세푸스는 그가 백성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자 그 권력을 두려워하여 헤롯이 그를 죽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세례 요한은 당시 특권층과는 갈등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역시 세례 요한이 자신과 같은 특권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잘못을 책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행동들을 했다. 주후 1세기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로마의 문화에 젖어 있었으며 정치적 세력과 결탁한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런 특권계층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후 1세기 유대인 가운데 세례 요한처럼 집을 떠나 세속화된 성전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멀리하고 광야에 머문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주후 1세기를 기록한 역사가들에 의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외에도 유대인들의 종파에는 에세네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정결을 중요시 여기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한 경우 처자를 두고 공동체 생활에 합류했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사해 주변 절벽에서 생활했다고 기록했으며 현재 쿰란이라고 불리는 유적지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마을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사진 1). 아직까지 기록자에 대한 논란은 종식되지 않았지만 1947년 이후 이스라엘 사해 주변의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의 주인은 에세네파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상은 성경을 베끼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기록한 ‘공동체규율’에 의하면 그들은 안식일과 절기를 율법대로 철저히 지켰으며 특별히 정결 예식을 위해 몸을 씻는 일을 잊지 않았다. 최근 학자들은 세례 요한을 이 에세네파의 일원이었다고 보고 있다. 집을 떠나 광야에 살고 있었다는 점,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점, 예루살렘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잘못을 지적한 점 등 그의 삶과 에세네파의 생활은 상당히 유사하다. 더구나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주후 6세기경 기록된 모자이크 지도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세례터를 기념하는 교회의 위치가 쿰란 유적지와 가깝다(사진 2). 에세네파는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대비하는 자였다(요 1:26~28). 그는 자신의 세례는 단지 물로 줄 뿐 뒤에 오는 그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성령의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단강에 오자 그를 알아보았으며 물로 세례를 베풀어 예수를 이스라엘에 나타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다(요 1:31~33). 요한복음 1:28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은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라고 말하고 있다. 베다니는 히브리어 ‘beth-anniah(בֵּית עַנְיָה)’가 어원일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이름으로 그 뜻이 ‘가난한 사람의 집’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에 흔하게 붙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 나사로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같은 이름으로 불려진 다른 마을일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후 3세기 신학자 오리겐의 기록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요단강 어귀에는 베다니라 불리는 이름의 마을이 없었다. 대신 그는 베트아바라(בית עברה, ‘건너편 집’이라는 뜻)라 불리는 곳을 세례 요한의 세례터로 추정하였으며 주후 6세기 마다바지도에는 베트아바라에 교회가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 베트아바라는 사해 북쪽으로 9km, 여리고에서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요단강 동쪽 제방에 위치한 알 마그타스(Al-Maghtas)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후 6세기에 세워졌던 교회터가 발견된 바 있다(사진 3). 

 

사진 1. 에세네파 거주지로 추정되는 주후 1세기경 유적지, 쿰란. 사진출처: 임미영

 

사진 2. 요르단 마다바에서 발견된 주후 6세기경 모자이크 지도에 표시된 세례 요한 세례터 기념교회. 사진출처: 임미영

 

사진 3. 알-마그타스(Al-Maghtas)에서 발견된 세례 요한 세례터 기념교회 흔적. 사진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Al-Maghtas#/media/File:Bethany_(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