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통묵상 333 - 성경 뒷 이야기(52)

2021.11.23

라기스 이야기(2)

요새화된 라기스
주전 1150년경 풍요로운 쉐펠라(평지) 지역의 부유한 라기스는 파괴되었고 여호수아 10장에 의하면 파괴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완전히 황폐한 도시로 버려졌던 도시였지만 라기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요새화한 왕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었고 히스기야 시대에도 보다 강화된 요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이었던 블레셋 땅과 마주하고 있었던 라기스는 이스라엘의 서쪽 경계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성벽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가나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성벽의 모습으로 지어졌는데 우선 직사각형 형태로 잘 다듬은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진흙벽돌을 쌓아 세워졌다. 라기스의 성벽에서 특이한 점은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으로 보다 강화된 요새의 모습이다. 외벽의 두께는 3m였으며 내벽의 두께는 6m나 되었다. 이렇게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모습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저수지가 두 성벽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사 22:10). 성벽은 누벽을 쌓아 무너지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벽의 남서쪽에 세워졌던 성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당대의 성문 중 가장 크고 튼튼하게 세워진 것으로 외벽과 내벽 모두에 각 각 성문이 있다. 외벽 성문의 경우 석벽돌을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높은 탑이 양쪽에 있어 방어를 위해 사용되었다. 성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조각이 경첩이 그대로 달린 채 발견되었는데 아카시아 나무였다. 성문의 표면은 동시대 앗수르 도시들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청동 판을 입혀 보호하였을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많은 부분이 발굴된 곳은 도시의 영주 혹은 행정관의 저택이다. 도시의 가장 상부에 위치해 있는 이 저택은 주변 지역보다 높게 단상을 쌓아 그 위에 지어졌다. 히스기야 시대에 가장 크게 확장된 저택이 세워졌으며 이 때 전체 크기는 76X36m에 달한다. 저택을 포함하여 안뜰과 마구간이 있어 이 지역은 벽을 한 번 더 둘러싸 요새화 한 것을 볼 수 있다.


산헤립의 침략
라기스를 이렇게 요새화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중해변 해안도로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도시 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 때 앗수르는 지중해변에 있는 블레셋의 도시들도 파괴하고 이집트의 북부지역까지 내려갔다. 남왕국 유다는 이 혼란의 틈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러한 전쟁의 위기 속에서 남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신앙적 개혁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었다(왕하 18:3-7). 그리고 그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꾀했다. 역사적으로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르곤의 암살은 히스기야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은 보다 강력한 제국확장 정책으로 남유다를 계속 압박했다. 산헤립은 이스라엘로 진격해 왔고 히스기야는 부랴부랴 성벽을 보수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산헤립의 일대기 기록에 의하면 그는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은 산헤립이 드디어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했다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앗수르 니느웨의 산헤립의 궁전 벽부조에서도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앗수르의 왕들은 자신들의 궁전 벽부조에 다른 나라를 점령한 승리의 장면들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원정의 시작부터 전쟁 장면 그리고 점령 이후 포로들과 조공을 받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궁전을 장식함으로 앗수르 왕의 부강한 힘을 과시하는데 노력했다. 더불어 벽부조는 전쟁 지역의 주변 환경과 성벽의 모습 심지어 그 지역 주민들의 의복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우리에게 고대 중동과 가나안 지역에 대한 자연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기스 벽부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쉐펠라 지역과 라기스 성, 그리고 유다인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라기스 주변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일나무인 대추야자나무(성경에서는 종려나무로 번역되었다)와 포도나무로 둘러 싸여 있는 것을 있다. 또한 벽부조에도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라기스의 성벽은 이중 성벽이며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이 보인다. 비탈길에는 도망가는 피난민들이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가고 있다. 피난민들과 앗수르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라기스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도 엿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인들은 앗수르의 군사들과는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벽부조에서 특이한 것은 앗수르 군사들이 라기스 성벽을 향해 공성퇴를 매단 병거를 밀 때 병거와 군사들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긴 세 개의 막대기 같은 형태가 눈에 띈다. 산헤립은 그의 일대기에 인공으로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해 공격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라기스를 발굴한 우쉬쉬킨(D.Ushshkin)교수는 라기스 언덕의 남서쪽에서 성벽을 향해 인공으로 쌓은 언덕을 발견했다. 이 언덕은 15,000톤의 흙과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공성퇴 병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언덕 위를 두껍게 회칠을 하였다. 라기스 성 내부에서는 이 언덕반대편에 누벽을 쌓아 성벽을 올리고 성벽을 넘어오는 이들을 공격하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개의 무기들 즉 물매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벽부조에서도 서로를 향해 던지고 쏘는 무기들의 묘사와 유다인들이 던지는 횃불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라기스 언덕의 한 동굴에서는 1,500명의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벽부조에서 보여지는 앗수르의 군사들이 적군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내관에게 보여주고 전쟁에 참여한 수당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라기스의 멸망
산헤립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라기스는 히스기야 시대 만큼의 모습으로 재현될 수는 없었지만 요시야 시대(주전 639-609년)에 다시 한 번 재건되었고 요새화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은 라기스도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바벨론과의 전쟁 역시 마치 영화를 보듯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는 “그 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라(렘 34:7)”고 당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라기스의 발굴을 통해서 이 역사적 장면이 사실임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 라기스의 장군으로 보이는 요아스에게 라기스와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 장관으로 보이는 호샤야후에게서 받은 편지가 쓰여 있는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18개의 편지는 대부분 호샤야후가 요아스에게 부탁을 하거나 군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4번 편지로 호샤야후는 요아스에게 아세가를 우리는 볼 수 없고 다만 라기스의 봉화만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 위에서 언급한 예레미야 34:7의 전쟁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라기스는 바벨론의 무차별한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라기스는 오랜 세월동안 버려진 황폐한 언덕이 되었다.

*산헤립의 침공 루뜨와 라기스의 지리적 위치

*산헤립의 라기스 점령

*라기스의 유다 포로들과 산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