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통묵상 332 - 성경 뒷 이야기(51)

2021.11.19

라기스 이야기(1)

광역도시, 라기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이지만 인천이나 부산 같은 광역시로 불리는 지방의 행정 중심도시가 있다. 인천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류작전에서 드러난 것처럼 행정뿐만 아니라 서해에서 수도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지리적,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성경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도시 중에 광역시의 성격을 띠었던 도시가 있다면 바로 라기스를 말 할 수 있다. 히스기야시대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산헤립의 경우 46개의 도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라기스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다 왕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을 협박한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왕하 18:14). 주전 14세기 이집트의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에 의하면 라기스는 라키샤(Lakisha)라 불리는 도시로 이집트가 가나안 남쪽 지역을 통치할 때 주요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것에 연합한 가나안의 큰 도시 중에는 라기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수 10장).

라기스의 위치와 발굴역사
라기스의 위치로 처음 알려진 곳은 텔 엘-헤시(Tell el-Hesi)였다. 이곳에서는 이집트의 장군 파푸(Paapu)가 보낸 쐐기 문자로 적힌 토판이 발견되어 중요한 도시였음이 거론되었지만 알브라이트(W.F. Albright)는 유적지의 크기에 있어서 그다지 큰 도시라 말할 수도 없었고 위치상으로도 성서의 에그론일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그는 1929년 텔 에드-두웨이르(Tell ed-Duweir)를 라기스라고 주장했다. 지중해 해변과 유다 산지의 헤브론 사이 히브리어로 쉐펠라(평지,신1:7)라 불리는 구릉지에 위치한 이 유적지는 예루살렘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떨어져 있다. 유다 지역의 곡창지대인 쉐펠라는 풍부한 수자원 덕분에 풍요로운 지역으로 유적지에는 오랜 세월동안 부유한 도시가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특별히 주전 8세기경의 요새화된 도시의 성문과 성벽의 발견은 산헤립이 니느웨에 기록한 라기스의 모습과 유사하여 이 유적지가 더욱 라기스이라는데 확신을 주었다.

라기스의 발굴 이야기는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처음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32-1938년 사이 4회에 걸쳐 웰컴 말스톤 고고학 연구소(Wellcome-Marston) 후원으로 제임스 스탈키(J.L. Starkey)의 지휘아래 시행되었다. 스탈키는 텔 에드-두웨이르를 발굴하기 전 유명한 이집트 고고학자 페트리와 함께 여러 발굴에 참여한 경험 많은 고고학자였고 덕망도 높아 발굴지 주변 아랍인들과도 상당히 사이가 좋았다. 1938년 어느 날 아랍 군사들 중 몇 명이 스탈키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물에 대한 욕심은 43세의 나이에 스탈키의 고고학적 인생을 마감시켰다. 스탈키의 발굴은 비록 그가 모두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그 업적이 훌륭하다. 현재 출판되어 있는 라기스에 대한 발굴보고서의 대부분의 내용들의 기초는 그의 발굴에서 나왔다. 후기청동기 시대의 해자 신전(Fosse Temple)과 유다왕국 시대의 성문과 방어용 누벽, 그리고 페르시아와 헬라시대의 태양숭배 성소(Solar shrine)등이 이미 그에 의해 발견된 바 있다. 그의 업적은 1966-1968년 사이 올가 터프넬(O. Tufnell)에 의해 정리되어 출판될 수 있었다. 최근 1973-1987년까지 그리고 1994년 텔아비브 대학교의 데비드 우쉬쉬킨(D. Ussishkin)교수의 지휘아래 보다 넓은 지역에 걸쳐 깊이 있는 발굴이 시행되었으며 2011년 6권에 걸친 방대한 양의 발굴 보고서를 출판한 바 있다. 또한 히브리대학교의 요시 가핑켈(Y. Gafinkel) 교수는 2014년부터 5년동안 라기스의 주전 10세기를 발굴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성서지리연구원에 의하면 한국팀이 한 구역을 맡아 본 발굴에 참석할 계획이라고 한다.

후기청동기 시대, 가나안의 라기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기스는 지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입지덕분에 꽤 오랫동안 도시가 번성하였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라기스는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000-2000년)를 거쳐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던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000-1600년)까지 상당히 많은 유물들을 세상에 드러냈다. 그러나 라기스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후기청동기 시대(주전 1600-1200년)에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는 아마르나 문서의 보고 때문이었다. 여호수아 10장에 의하면 부유한 라기스를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실제로 유적지는 주전 1150년경 완전히 황폐한 도시로 버려졌다. “여호수아가 또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립나에서 라기스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점령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같았더라(수 10:31-32). 도시는 주전 900년경 초반 다시 크게 건설되었는데 아마도 솔로몬 이후 분열왕국의 남유다 왕 르호보암에 의한 것일 것이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라기스에는 크고 잘 요새화된 도시가 언덕 전체에 걸쳐 위치해 있었다. 도시 성벽을 따라 땅을 파서 만든 해자(fosse/moat)가 마련되어 있어 도시를 함락하려는 적군에게는 상당히 고된 전쟁이었을 것이다. 도시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안뜰과 여러 방으로 이루어진 라기스 왕의 궁전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이 궁전의 주인공 중 하나는 기브온이 이스라엘고 화친한 것을 괘씸하게 여겨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에글론 왕 드빌과 연합한 라기스 왕 야비아였을 것이다.

후기청동기 시대 가장 주목받는 유적은 두 개의 가나안 신전이다. 첫 번째 신전은 해자 신전(Fosse Temple)이라 불리는 것으로 언덕의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신전 주변에 해자가 파져 있다. 스탈키의 발굴에 의해 드러난 이 신전은 후기청동기 시대 라기스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들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스탈키가 죽은 후 이 신전의 유물들은 그 지역 아랍인들에 의해 도단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남겨진 유물들 중에는 제의 용기, 제수 용기, 값비싼 수입 토기, 보석으로 사용된 파양스, 상아조각들이 있어 그 풍요로움을 상상할 수 있다. 신전의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기둥들이 있어 지붕을 지탱하게 되어 있었고 지성소는 신전 끝에 다른 장소보다 높은 단상이 마련되어 있는 곳으로 아마도 신상이 서 있었을 것이다. 벽면으로는 벤치들이 있어 제물을 올려 놓을 수 있었다. 신전은 주전 15-13세기 사이 3번에 걸쳐 재건축되었는데 마지막 층의 신전은 도시가 파괴되면서 함께 무너졌다.

또 다른 신전은 언덕의 꼭대기 왕실이 있는 곳에 위치한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나 성소 등이 이집트의 신전과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소 안에는 해자 신전처럼 높은 단상이 마련되어 지성소로 사용되었다. 두 개의 8각형 모양의 돌로 만든 기둥이 나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벽들은 색칠을 한 회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신전 역시 도시의 파괴와 함께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파괴의 주인공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것이다(수 10:31-32).

*쉐펠라 지역의 라기스 위치와 산헤립의 라기스 공격 루뜨


*텔 라기스 유적 및 복구